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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아시아

2002 중국 베이징 만리장성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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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8월 15일 목 (北京) 4일차
 
08:00 버스를 타고 오늘의 관광지 만리장성으로 출발. 

만리장성 가는 길에 어마어마하게 규모가 큰 옥가게를 들린다.
모든 관광버스가 다 들리는 것 같다.거의 대부분 한국 관광객이다.

 9:40 옥가게를 나와 빠다링(八達嶺)으로 출발.
빠다링은 四通八達에서 나온 말로 교통의 요지인 곳이다. 

11:40경 도착했다. 주차장은 차들과 사람들로 넘친다.
 
그러나 케이블카 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듯. 

왕복 60위안.1회 40위안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만리장성으로 올라갔다.
어떻게 올라왔는지 엄청난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처소(화장실)에 가려니 1위안씩 이란다. 간이 화장실을 만들어 놓고
사용료를 받는다. 하긴 그 높은 산위에 이 많은 사람이 일을 본다면 

그 처리 비용도 만만치 않을 듯.
 
이곳은 명나라 시대 재축성한 성으로 벽돌을 구워 쌓은 곳이다. 

우주선에서 육안으로도 보인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말은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거짓이라고 한다. 그만큼 지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축조물이라는 허풍에 불과하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중국 인민의 무덤이라고 한다. 

만리장성을 축조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붙들려 온 인민들이
그곳에서 허기와 추위로 수없이 죽었고 그자리에 바로 묻었다고 한다.
만리장성은 국방과학측면에서 보면 별로 유용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한곳의 성이 점령되면 성이 이어진 곳이
모두 점령당할 위험 요소가 더 많다고 한다.

 

만리장성

 

계단을 올라 만리장성 성벽에 올라보니 폭이 약 3-4m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가장 높은 루까지 올라갔다 왔다
거의 정상 부근엔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배경으로 일회용 기념사진을 찍는 

곳인데 모두들 사진 한장 찍으려고 난리다.
중국 인민들도 자식 교육을 위해 방학때면 꾸궁(故宮), 만리장성에 자녀들을

데리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다고 한다. 
 
날씨가 흐린 건 아닌데 산 저멀리는 뿌옇게 회색빛이라 멀리 보이질 않는다.

하긴 베이징의 대기 오염도 심각한 수준이라고
하니 현대화의 부산물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11:45에 빠다링을 출발.베이징 시내로 돌아와 점심식사하러 들어간 곳의 

규모 또한 엄청나다. 한번에 1000명을 수용가능 하다고 하니
가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을 것이다. 

한국 사람의 입맛에 거의 맞춘든... 식사는 먹을 만 했다. 

하도 시끄러워 정신이 없다.
식사후는 식당과 붙은 가게에서 쇼핑하게끔 어머어머한 쇼핑쎈터가 있다.
 
식사후 明13릉의 하나인 정릉으로 출발했다.
정릉(定陵) 지하 궁전은 1956년에 최초로 발굴한 황제능묘이다. 

명나라 선조의 장릉(長陵)이 명 영락7년(1409년)에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하여 이후에 11개의 릉이 장릉의 양 옆으로 세워졌다. 

명 송정제 주유검(朱由檢)의 사릉(思陵)이 마지막 릉인데, 
청 순치(順治) 원년(1644년)에 정릉(定陵)이라고 칭하고 

땅 위에 건축 구조물로 릉을 조성하였다. 
 
현재는 장(長), 정(定), 소(昭)릉 세 곳과 신도(神道) 네 곳만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지하궁전은 높이 27m, 면적 1,195㎢의
석조구조로서 계단을 타고 한참을 내려간다.석관의 규모는 엄청나다.

하여간 중국의 유적들은 규모면에서 우리를 압도한다.
 
정릉을 나와 관광의 코스인 한방약국으로 출발했다.

사회주의 체제라 가이드들도 어쩔 수 없이 당국의 지시대로 꼭 들러가야하기
때문에 가이드들도 아주 피곤하다고 한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방들이 있는데 일행이 들어가니 무슨 

난로 같은 곳에 쇠사슬을 불에 달구고 있었다.멀쩡하게 생긴 조선족 젊은이가 흰까운
걸치고 나와 파스와 연고를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 연고는 화상에 특효가 있는데 자기가 쇠사슬을 손으로 잡고 나서
연고를 바르는 시범을 보이겠단다. 이런 끔찍한 쇼가 있나? 

우리 일행은 모두 말렸다.자기는 일주일 정도 쉬면 다 나을 수가 있단다.
우리의 제제로 그냥 두었지만 무서운 사회주의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파스를 한통에 230위안씩 3통 샀다.선물용으로....
 
그곳을 나와 다시 들린 곳이 茶 박사라는 茶판매 가게이다.

아직 한국말이 서투른 조선족 아가씨가 열심히 차를 권하고 

홍보하는데 우리 일행은
시안에서 이미 차를 다샀기 때문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 조선족 아가씨 눈치를 채고 차판매 용기에 얼마든지 꾺꾹 눌러 담아서 
사라고 온갖 정성를 다한다.그냥 나오자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왜 우리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지....씁쓸한 기분이다.

시안에서 우리 일행이 모두 차를 샀기 때문이다.

각지에서 조금씩 나누어 사는 지혜(?)가 필요한 것을 몰랐던 것이다.
 
茶가게를 나와 버스를 타고 기다리고 있는데 가이드 박설화의 손에 

무언가 들려있다. 아마 우리가 차를 한통도 안사서 가이드가 사준게
아닌가 싶다.이럴 수가 있나....
 
버스를 타고 다시 베이징 시내로 들어와 저녁 식사하러 한국 식당에 

들어갔다.베이징에서 먹는 한국 식사는 별로 였다.차라리 중국식이
나은 것 같다.나만 그런지 그건 모르겠지만..
 

 

어린아이들의 묘기

 

식사후 코스는 기예쇼를 관람하는 곳인 조양극장이란 곳이다. 

조양극장에서는 거의 서커스에 가까운 쇼를 보여주는데
출연자들이 모두 어리다.접시 돌리기,자전거 타기등등 어린 나이에 그런 재주를 

부리니 기특하다고 할까?
한편으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할 나이에 저런 혹독한 훈련끝에나 할 수 있는 

곡예를 공연해야 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단면을 보는 거 같아 못내 안스럽다.
 
공연이 끝나고 길을 건너는데 우리도 중국사람이 다 되었다.

차가 오건 말건 떼지어 건너간다. 환경이란 이래서 무서운 것인가 보다.
 

호텔에 돌아와 씻고 자려는데 새댁네에서 전화가 왔다.

한잔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의기 투합해 길로 나왔지만 늦은 시간이라 갈데가 마땅치 않다.
육교부근의 맥주집으로 들어갔다.여기는 11시 이후부터는 정액제란다.

즉 맥주를 원하는데로 계속 마실 수가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렇게 하면 망할텐데....새댁 남편이 가이드 이 대리도 불러내어 같이 동석,
이런저런 얘기 하다보니 1시가 넘었다. 이제 그만 문닫아야 하니 

나가달라고 한다.맥주도 어지간히 마셨으니 그만 잠자러 가야지.....
 
새댁 남편과 가이드는 호텔내에서 한잔 더 마시자고 한다. 

젊으니 좋구나.우리 부부는 사양하고 방으로 들어가고
젊은 친구들은 한잔 더 하고 잔단다. 하긴 아쉬운 밤이지.......

오늘은 하루 일정중 밤시간에 술 한잔 마시는 여유를 가져본 시간이다. 
 

2002년 8월 16일 금 (北京) 5일차
 
7:30에 오늘은 일찍 호텔을 출발.가이드 박설화양이 버스안에서 

내일 天津의 비행장 가기전 천진 고문화 거리를 보기로 한 일정이
바쁘니 오늘 북경의 유리창 거리를 보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 

왜냐하면 아침에 베이징을 출발 ,티엔진(天津)을 가서 고문화거리를 
거리를 돌아보면 너무 일정이 빠듯하기 때문이란다.
 
모두들 한마디씩 한다. 그렇게 빠듯한줄 알면서 그

런 일정을 왜 잡았냐고 그냥 원래 스케쥴대로 하자는 사람과 오늘 북경 유리창거리를
보자는 사람,다수의 의견에 따르겠다는 사람.

이렇게 3부류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기사양반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침 몇시에 출발해야 고문화 거리를 보고 비행장에 갈 수 있는지 아느냐고? 
 
원래 비행기가 베이징에서 출발 하는 건데 비행기 

좌석이 없어 천진(티엔진)으로 바뀌면서 서비스로 티엔진 고문화 거리 관광을 추가 시켜
놓은 것이다.

가이드 박설화양은 풀이 죽어 관광 안내도 제대로 안하고 목소리도 작다.

대충 의견은 오늘 북경리창 거리를 보는 것으로 정리 되었다.

 

천단공원

 

처음 도착한 곳은 천단공원이다.황제가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한다. 

아침부터 엄청난 인파다.박설화양은 오늘은 엄청나게 많이 걸어야
하니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당부한다.그리고 일행을 잃어 버릴 수 

있으니 일행을 놓지지 않도록 주의를 해서 따라 오라고 한다.
 

물로 붓글씨 쓰는 노인

 

들어가는 길에 맹물로 시멘트 바닥에 붓글씨를 쓰는 노인이 보인다. 

앞부분의 글씨는 거의 말라가고 있어 잘 보이지 않으나 필체는
상당한 수준인 것 같다.
 
회음벽이란 곳이 있는데 둘러쳐진 담장을 따라 음이 전달되어 저편에서 

이야기를 해도 가까이 들린다고 하는데 직접해보지는 못했다.
 
나오는 길에는 정자같은 곳에서 비파 비슷한 악기를 연주하고 사람들이 

둘러모여 감상을 하거나 구경을 하고 있고 한켠에서는 사교댄스
비슷한 춤을 추는 한 무리의 노인들을 볼 수 있었다. 

중국도 노인문제가 심각한 것 아닌가?아직도 노동할 수 있는 나이의 무리인 것 같아 보인다.
 
천단공원을 나와 유리창 거리로 향했다. 이곳은 고서적,골동품등을 파는 거리였다.

붓 한자루와 부채를 하나씩 사고 구경하다
중국 여인들의 전통옷인 파오차이를 하나 샀다.

처음에 가격을 부르기는 170위안을 불렀다 그래서 깍아 산 것이 130위안.
잘 산건지 잘 모르겠다.
 

천안문 광장

 

10:00경 천안문 광장에 도착했다.TV에서만 보던 천안문 광장을 보니 과연 규모가 

어마어마한 것을 실감한다.
광장에 다 모여보니 새댁 남편이 안보인다.아마 비디오 테이프를 사러 뒤쳐졌다가 

일행을 놓친 것 같다.그많은 인파들 속에서
사람을 찾는 것은 보통이 아니다.박설화양은 만약 일행을 잃어버리면 그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실감이 나는 말이다. 여기 중국 사람들도 나름대로 같은 노란 모자,하얀 모자,

같은 티셔츠를 입어서 서로 일행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도록 차려 입고 다닌다.
다행이 가이드 이대리와 새댁이 오던길을 되집어 가서 극적인 상봉(?)을 했다. 
 

 

자금성

 

 

예전에는 잡상인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물건을 팔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공안들이 

곳곳에 서서 이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잡상인들이 공안이 나타나면 잽싸게 숨는 모습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광장옆의 모택동의 시신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과 공산당 당사는 줄을 선 중국 인민들로 구경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단다.
지하도를 건너 천안문을 관통해서 자금성의 오문(午門) 을 통과해 자금성의 관광이 시작됐다.
 
 

 

 

고궁박물관

 

제대로 구경다운 구경도 못하고 앞으로 앞으로 계속 걸었다. 

하긴 반나절도 안되는 시간으로 무얼 본단 말인가? 
그 규모의 거대함에 놀라고 기 죽을 뿐이다. 

자금성을 중국사람들은 꾸궁(故宮)이라고 하는데 후문의
현판 대리석에는 고궁박물관이라고 쓰여져 있다.
 
자금성 후문앞의 경산공원에 들린다.자금성을 건축하면서 나온 흙을 쌓아 

만든 것이 경산공원이란다.경산 공원의 맨 위
누각에 올라 자금성을 내려다 보면 그 엄청난 규모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시가지가 뿌옇게 안개낀 것처럼 멀리는
보이질 않는다.공해로 인한 스모그 인듯 싶다.
 

 

 

스모그 잔뜩 낀 자금성

 

경산공원 입구에서 자금성 사진첩을 판다.30위안에 깍아서 샀다. 

엽서를 끼워서 40위안 인가 내라고 하면서 쫒아온다.
30위안만 주고 얼른 공원 안으로 들어왔다. 

경산 공원 후문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가 떠나려는 순간은 값이 더 내려 가는 것 같다.
 
오후 2:00시가 다 되어서야 식당에 도착 끼니를 해결하고 서 태후가 

인공적으로 판 호수라고 하는 이화원 구경을 나섰다..
구미 열강들이 호시탐탐 중국의 안방을 차지하려고 하는 와중에 해군 

군비로 이 호수를 건설해서 서태후에 대한 비난이 엄청 났었다고 한다.
 

 

 

이화원

 

중국 황실은 도데체 얼마만한 권력을 지녔기에 이런 거대한 토목공사를 거침 없이 

해 낼 수가 있단 말인가.지금 같으면야
장비라도 좋다고 하지만 그 옛날엔 사람과 소,말등 가축뿐이었을테니 인민들의 

비참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공산당이 인민들을 설득할 좋은 구실을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비를 맞지 않고 이화원내를 돌아디닐 수 있도록 한 회랑은 회랑 위의 그림들이 

전부 고전소설을 묘사한 것이라 한다.
그림의 숫자도 엄청 많다.
 
배를타고 호수 가운데로 나가니 저 멀리 돌로 만든 배 석주도 보인다. 

물에 뜨는 배가 아니라 돌로 배모양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서태후가 저곳에서 연회도 벌이고 달놀이도 했다고 한다.
 
이화원을 주마간산으로 보고 나와 들른 곳은 북경 제 2 의료원이다. 

중국의 고위관리나 부자들이 찾는 병원이라고 한다.
병원의 건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세련된 건물이 아니다. 

2층 계단을 올라가 강의실이라고 붙여진 방으로 안내한다.
다른 일행도 방이 없어 같이 들어가게 되었다.
 
조선족 여 한의사가 들어와 최형우 전 의원이 중풍에 걸려 거동을 못하다가 

완치는 안되었지만 상태가 호전되어 나갔고
정세영 현대그룹 회장도 휠체어를 버리고 걸어나갔을 만큼 유명한 곳이라고 

병원의 유래와 기타등등을 설며하고 나가더니
2팀의 중국 한의사와 조선족 간호사가 들어온다.
 
모두들의 진맥을 보더니 무언가 처방을 내린다.우리집 사람이 나가 

진맥을 보는데 내가 안나갔더니 간호사 왈 "관심이 없으세요?"
내가 씁씁한 미소만 짓자 영 불쾌한 표정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아직 고객에 대한 서비스의 개념이 없는 것 같다.
일행중 의사이신 분은 바로 그냥 나가신다. 

그분 왈 "개인 진료 챠트도 안만들고 어떻게 이런 식으로 처방하고 약을 파는지 

어이가 없군"하신다.
일행중 부부한쌍이 돈이 없다고하자 카드도 된다고하여 카드처리하고 

백만원이 넘는 약을 샀다. 효과가 있으면 좋으련만...
 
오후 5:40경 식사를 하러 갔다.오늘은 북경 카오야 즉 오리구이를 

먹었다.모두들 지쳐서 그런지 음식이 많이 남았다.
 
호텔로 돌아와 희망하는 사람만 가이드 이대리의 개인적인 안내로 

왕푸징 거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모이고 보니 제일 연장자인 인천의
관세사 부부 한팀만 남고 모두들 가는 것으로.....
 
지하철을 타본다. 3위안.아직 1호선과 2호선밖에 운행을 안한다. 

1호선은 북경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노선,2호선은 순환선이다.
차표도 일반 용지에 검표도 사람이 한다. 표를 받아 반쪽 찢어준다. 

차량도 아직 세련되지 못했다.에어컨이 없고 선풍기가 돌아간다.
 
드디어 왕푸징 거리. 8차선 도로폭 정도 되는 길이 차없는 거리로 

개방되어 있고 각종 조명으로 훤하다.아직은 쇼윈도 디스플레이나
조명은 세련 되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그 유명한 먹자 골목에 들어갔다. 

일정 규격의 포장마차에 불을 밝히고 각종 먹을거리를 판매하고
정찰제이다.양고기 구이,개고기 구이, 개구리 구이,뱀,전갈 구이 드으등....
우리는 양고기 구이 한꼬치씩 주문해서 먹어본다. 그리고 맥주 한캔 씩...

맥주를 들고 마시면서 걷자 길거리의 할머니가 빈캔을 노리고 계속 따라온다.
이것도 팔면 괜찮은 수입이 되는 듯....

마시다 말고 할머니의 쓰레기 통에 던져 주었다.
전갈 구이도 한꼬치 주문,3마리에 15위안이다.

새댁 남편과 내가 한마리씩 시식해본다.빠싹한게 고소하다.뭐 새우 먹는 맛이랄까?
 
양고기꼬치 5위안/꼬치
코코넛 10위안/개
옥수수 4위안/개
전갈 15위안/꼬치(3마리)
 
가이드 이대리와 헤어진 후 시장(市場:백화점)에 들어갔으나 

별로 살만한 것도 없어 두팀으로 나뉘어 각자 돌아다니다 선물 구경하고 사기도 하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2002년 8월 17일 토 (北京 -> 천진 -> 서울 ) 6일차
 
천진으로 가서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다.
버스안에서 관세사 할아버지가 자기들만 빼 놓고 왕푸징 갔다고 섭섭해 하신다.
하긴 나이 많다고 왕따 시키면 안되지...ㅎㅎ
 
짦은 기간에 세도시를 돌며 그냥 스쳐지나가는 여행이지만 

새로운 세상을 돌아보고 간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그러나 저러나 이런 주마간산의 패키지 여행은 

그만 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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