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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아시아

2002 중국 시안, 병마용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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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8월 14일 수 3일차, 시안- 베이징(西安 --> 北京) 
 
시안을 하루만에 보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란 걸 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식사는 꾸이린(桂林) 보다 못하다는 것이 일행들의 의견이다.
 
버스를 타고 碑林(비림)에 도착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비석의 숲. 

그러나 이곳은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공묘의 건물들이라 한.
 

碑林(비림) 입구

 

 

碑林(비림)

 

碑 자의 田위의 삐침획 하나가 없다. 내가 책에서 읽은 바로는 田은 농민을 상징하는 글자라 

그위에 무언가 농민을 억누르는 것이 있으면 안되므로 뺐다고 읽었는데 가이드는 아편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인 영국배의 아편을 몰수한 임칙서가 아편전쟁후 열강들의 요구로 신강성으로 

유배 가던중 서안에 들러 훗날 반드시 돌아와 다시 한획을 쓰겠다고 남겨놓았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해 田 위에 한획이 없다고 하니 어느 설이 맞는지 모르겠다.
 
각지의 비석들을 모아 집을 짓고 그안에 2,300여개의 비석을 보관하고 있다.

구양순, 안진경의 글씨체들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지금 보존되고 있는 것들도 문화혁명때 홍위병들에 의해 마구 짓밟히고 부수어져 

버리고 그나마 남은 것들이라 한다.

 

 

탁본을 하고 있는 작업광경도 직접 볼 수 있었다. 돈 벌려고 탁본을 계속하다 

보면 아무리 돌이라고 하지만 닳아서 없어 질테니....

언젠가 깨닫고 탁본을 금지하겠지만 중국은 당국이나 인민들이나 돈맛에 톡톡히 

들린 사람들이라 조만간에는 이 작업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안진경의 글씨체가 담긴 탁본을 하나 사려고 가격을 물어보니 300 위안이 넘는다. 

깍을 자신도 없고 해서 그냥 발길을 돌린다.
 
다음 들린 곳이 대안탑이 바로 보이는 찻집.방이 따로 따로 마련된 곳에서 

조선족 아가씨가 열심히 설명을 하면서 차를 시음시키며 차를 판매한다.

우리 일행 전부는 많이 산다는 구실로 활인해서 샀다. 

가이드 이 대리 왈 차값을 깍아서 산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며 웃는다. 

비싼건지 싼건지? 한통에 100원 하는 것을 80원에 샀는데 우리 일행이 

거의 다 샀다. 이게 나중에 문제(?)아닌 문제가 될줄이야....베이징이야기에서 

할 예정이다.
 
대안탑은 버스로 한바퀴 돌고 통과.신호등이 없는 로터리라 교통체증이 

심하다.양보란 있을 수 없다. 깡다구 센 운전자가 먼저 통과하는 것이다.
 

 

화청지 입구

 

 

화청지

 

화청지에 도착했다. 화청지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곳이다. 

양귀비가 온천욕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지만
1936년 12월12일 국민당 장개석이 부하인 장학량에게 감금되었던 곳이다. 
이일이 계기가 되어 제2차 국공합작이 맺어졌다. 이곳에는 아직도 장개석의 

사무실과 침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고 유리에 총알자국도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나라 노태우 전 대통령(중국에서는 총통이라한다) 1997년에 방문했었나 보다. 

유명인사들이 화청지를 방문한 사진들이 차례로 걸려있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진도 걸려있다.
 

 

양귀비 석상

 

하얀색의 돌로 만들어진 양귀비의 상이 연못에 서있다. 미의 기준은 

세월따라 변하는 것.오동통한 여인이라는 느낌밖에 안든다. 

그녀가 목욕했다는 해당탕과 연화탕 온천을 둘러보니 목욕과 인간의 

탐욕과는 불가분의 관계인듯 로마에서도 목욕탕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것을 느꼈는데 로마의 목욕탕은 거의 수영장 수준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주지육림이란 말이 여기 화청지에서 부터 나왔다 하니 가히 그 옛날의 

호화스럽고 방탕한 생활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 화청지를 나와 점심코스인 교자연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의례 규모가 크니 이젠 놀랄 것도 없다.
18가지인가 만두가 나왔는데 어떤 것은 맛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그저 그랬다.

만두의 종류가 몇백개인데 그걸 다먹어본 사람이 양귀비와 서태후밖에 없단다.
 
종업원들의 서비스 수준은 엉망이다. 하긴 지금 무수한 관광객이 밀려들고 

있으니 서비스는 기대하지 말아야 겠지만...
국물을 흘린다거나 하는 일은 예사다. 나올때 무언가 종이를 내민다. 

대충 한자를 읽어보니 서비스 만족도 설문조사다.
별로 내키지 않아 그냥 나오려는데 일행중 한분이 모두 만족스럽다는데 

표시를 해주고 종업원에게 좋으냐고
물어보자 웃음이 함빡 먹은 얼굴로 받아간다.그래도 나름대로 서비스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점이 엿보인다.
 

 

진시황 지하궁 모형박물관

 

다음은 진시황릉으로 갔다.

지하궁 모형박물관 입장. 이건 선택관광 이었다.

진시황릉은 아직 발굴이 안되어 내부가 공개되지는 않았으나
사마천의 사기와 내부를 단층 촬영등 어림직작으로 상상한 1/350 모형을 지하에 

만들어 놓은 곳이다. 


내부는 어두컴컴한데 색색의 조명으로 요상한 분위기가 감돌도록 해놓았다.

사진 촬영 금지 지역. 일행중 새댁네 남편이 캠코더로 사진을 찍자 저쪽 구석에 

앉아있던 감시원이 슬며시 내려온다. 얼른 귀띰을 해주고 플래쉬를 터뜨리지 않고
몇장의 사진을 찍는다.
 
진시황릉은 외부의 도굴을 방지하기위해 수은이 사방 강처럼 흐르도록 

해놓았고 화살이 발사되도록 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공사에 동원된 인민들을 모조리 가둬버려 아무도 진시황능의 존재를 

모르다가 최근에 위치를 알게 되었다고...
 
가이드 이 대리의 말로는 일본이 진시황릉의 발굴 탐사를 완벽하게 해 줄테니 

그 댓가로 어마어마한 돈을 요구해서
중국 정부가 "천만의 말씀, 우리 기술이 발전해서 우리 손으로 발굴할 수 

있을 때 까지 그냥 두겠다"해서 그대로 있다고 한다.
 
밖으로 나와 진시황릉으로 갔다.원래 높이가 120m 였는데 기나긴 

세월 동안 깍여나가 현재 51.7m라고 한다. 지금은 석류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다.
이렇게 석류나무를 심어놓은 것은 도굴꾼들이 쉽게 파헤치지 못하게 하려고 

심어 놓았다고 한다.
계단을 따라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꼭대기는 평지를 만들어 놓았고 

이곳에는 특이하게 물을 공짜(免費)로 준다.
중국땅에서 공짜로 물한병 얻어마시고 사방을 둘러보니 남쪽으로 

길게 산이 뻗었고 그외는 전부 평지였다.
 
절대 권력자로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를 만든 진시황이 인민들을 

착취한 댓가를 수천년이 지난 지금 세계 각지에서 진시황의 업적(?)을 보려는
사람들로 부터 돈을 걷어들여 현재의 중국 인민들을 먹여살린다고 하니 

역사의 평가는 당대에서 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옛부터 독재자,폭군이 아니면 역사의 유물을 남기지 못한 것을 보면 

권좌에 오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물리적인
유물을 남겨서 후세의 사람들에게 입에 오르내리게 하고픈 욕망이 

늘 잠재해 있는 것이 아닐까?
 
병마용 사진집을 사려는데 1권에 한국돈으로 10,000원을 부른다.무슨소리?
50위안씩에 일행과 함께 두권을 샀다. 잘 산건지?

물건 살때 마다 이런 고민을 해야 하다니.
 
1974년 농부가 우물을 파려다 발견했다고 하는 병마용 관람이다. 

진시황릉의 동편에서 진시황릉을 지키고 있는 형세라 한다.
세계적으로 너무 유명한 병마용 유물 박물관. 그토록 보고싶은 곳이었다.
대학 2학년때 신문에 난 발굴 소식을 읽으며 정말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병마용.
그후로도 책자에서 간혹 사진을 보며 가보고 싶다는 생가을 했었는데 

병마용을 직접보다니.....
 
입장권도 세련되어 전화카드 식이다.그런데 이걸 체크하는 것은 사람이다. 

3호관, 4호관 입구에서 역에서 기차표에 구멍 뚫어주는 것처럼 
구멍을 사람이 뚫어준다. 아직 사람이 많이 남으니 일자리를 마련해야지...
 
항우가 병마용의 무기를 꺼내어 사용하기 위해 도굴을 하고 난뒤 

불을 질렀는데 그게 오히려 갱 내부를 진공상태로 만들어 버려
유물들의 보존이 더 온전해졌다고 한다.

 

병마용

 

병마용 1호관에 들어가 보았다.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이곳은 보병부대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2호관은 지휘부대, 3호관은 기병부대를 재현. 그 넓은 곳을 기둥하나

없이 지붕을 씌워 유물을 보존하고 있다.

예전에는 사진을 못찍게 한다고 들었는데 사진도 마음대로 찍을 수 있었다.

 

 

병마용

 

 

4호관 입구

 

나중에 발굴한 곳으로 갈수록 건물 내부 마감이 세련되고 쾌적하다. 

4호관에는 동으로 만든 마차 모형 그리고 양산의 각도 조절하는 봉을
재현 해놓은 것을 보고 그 시절에 이런 것 까지 생각해 고안한 것을 보면 문화나 

기술이 어느정도 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진시황의 업적은 많다. 전국의 한자를 통일하고 문서를 통일하여 행정의 

능률을 높이고 화폐를 통일하거나 한점이다. 하지만 분서갱유로
모든 책을 태워버린 것은 뭐라고 해야하나?
 
나오는 길에 우리 일행중 공주에 사시는 분이 버스에 돌아오지 않는다. 

현지 가이드와 이대리가 찾으러 다시 병마용 정문에 가서 만나 돌아왔다. 

마나님은 뿔이 잔득 났다. 여행을 다니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게 마련...
 
다시 들른 곳은 옥가게. 이것 저것 구경하다 옥베게 한점 샀다. 

그리고 이른 저녁식사. 밥맛이 없다.배고파야 되는데
더위도 먹고 점심먹고 돌아선지 몇시간 지나지 않았으니...

이제 시안을 떠나 베이징으로 간다.
공항에 도착. 꽤나 탑승 수속이 복잡하다.

짐을 부치고 가게에서 병마용 기념품 한점 샀다.

 220위안 정가가 붙은 것을 150위안에 샀다.
그런데 일행중 한명이 여행용 가방을 70위안에 샀는데 

도저히 원가를 알 수 없다. 한국에서 그 정도는 몇 만원에
주고 사야될 만큼 괜찮은 품질인 것 같다.
 
시안에서 베이징가는 비행기는 그래도 넓고 깨끗하다. 

저녁 식사를 제공했는지 기억이 가물 거린다.
서비스 차원에서 항공사 로고가 들어간 우산을 하나씩 

준것은 기억이 나는데...비행기 삯이 워낙 비싸 부자들만 탈 수 있다는데
서비스도 계림이 시안 보다 낫다. 하여간 우리가 말로만 

듣던 중국의 모습은 아니다라는 것이 뇌리에 남는다.
 
해질 무렵의 구름위 일몰 광경이 비행기창 밖에 멋진 

모습을 펼친다. 얼른 카메라를 꺼내 한컷 찍는다.
 
드디어 베이징공항에 10:10경 도착했다. 

거의 두시간의 비행이다. 베이징의 현지 가이드는 박설화. 

예쁘장한 체구의 조선족 아가씨.
일행중 한분이 엄청나게 반가운 투로 환영의 인사를 건넨다. 

그동안 남자 현지 가이드가 안내를 했으므로....
버스를 타고 약 1시간 걸려 베이징 시내의 홀리데이 인 호텔에 도착했다.

모두들 피곤이 겹쳐 일찍 잠자리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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